글쟁이, 코딩한다

내 이름은 루렌도 은쿠카 : 난민, 루렌도 가족 (재구성) 본문

나는 글도 쓴다/나는 기사도 썼다

내 이름은 루렌도 은쿠카 : 난민, 루렌도 가족 (재구성)

Algori 2021. 1. 25. 22:30

옛 블로그 끌어오기 2탄 기사 이야기(3)

 재미있게 썼던 기사들. 이 기사도 따로 발행하지 않고, 개인 포트폴리오 용으로 작업했다.

 기존 이슈를 스토리텔링 기반 재구성했다. 사진은 저작권 이슈도 있으니 따로 게재하지 않는다. 

 

내 이름은 루렌도 은쿠카

공항에서의 287일, 난민 루렌도 씨 가족 이야기

 지난 2019년 10월 11일(기사를 쓴 시점은 2019년 말이다), 인천 공항에서 287일간 머물던 루렌도(47) 가족이 입국했다. 앙골라의 콩고인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들어온 이들은 그동안 난민 심사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서울고법의 결정으로 이제야 난민 심사를 받을 길이 열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기자가 루렌도 씨 1인칭 시점으로 써내려갔다.

내 이름은 루렌도 은쿠카

 나는 콩고 출신 앙골라 인이다. 우리 가족은 박해를 피해 도망쳤다. 그렇게 도착한 한국에서 입국을 거부당했다. 인천공항에서 287일을 살았다. 아내 보베트와 네 명의 아이, 아홉 살 레마, 일곱 살 쌍둥이 로드와 실로, 다섯 살 그라스도 함께. 우리는 아직도 난민이 아니다. 난민 인정 심사를 받기 위해 거의 1년을 보냈다. 나는 앙골라로 돌아갈 수 없다. 앙골라에서 우리 가족은 죽거나 다칠 것이다. 내 이름은 루렌도 은쿠카다.

 운이 나빴다. 내가 몰던 택시가 경찰 지프와 부딪혔다. 경찰이 나를 끌고 갔다. 앙골라 사람들은 콩고 인을 미워한다. 콩고 정부가 앙골라 내전 시 반군을 지원했기 때문에. 콩고와 앙골라는 프랑스어 억양이 다르다. 나는 콩고 사람인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콩고 인으로 태어나길 원한 건 아니다. 앙골라 경찰들은 나를 열흘 동안 가두고, 때렸다. 보베트는 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아내는 한쪽 다리가 부러진 안경을 썼다. 자궁에 문제도 생겼다. 그녀는 우울증을 앓았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택시가 사라졌다. 어디에도 말 할 곳이 없었다. 집을 팔았다. 우리는 앙골라를 떠났다. 살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2018년 12월 28일, 우리는 한국 인천공항으로 왔다.

공항에서의 287일

 누군가 말했다. 한국은 난민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나라라고. 하지만 인천공항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단호했다. 우리는 여권을 압수당했다. 공항에서, 새해를 맞았다. 나는 난민 신청을 했다. 난민이 되어야 했다. 일주일 후, 그들은 다시 불회부 결정을 내렸다. 통역도 없었다. 내 말을 알아듣기는 했을까. 공항직원은 말했다. We abandon you.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살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우리는 46번 게이트 앞에 자리 잡았다.

 천 소파 여섯 개를 붙였다. 옆으로 캐리어 열다섯 개를 쌓아올렸다. 우리의 전부였다. 이곳은 우리 가족의 집이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 냄새를 맡았다. 지나가며 힐끔힐끔 쳐다봤다. 기자들도 오갔다. 그들이 우리 사진을 찍어갔다. 나는 가족 모두 얼굴을 가리게 했다. 밤이면 불빛이 눈을 찔렀다. 불은 꺼지지 않는다. 바삐 움직이는 이들을 위해 에어컨이 돌아간다. 옷을 아무리 껴입어도 추웠다. 그나마 아이들은 잠에서 잘 깨지 않았다. 낮에는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아이들이 슬리퍼만 신어서 발이 시렸을 텐데.

 

 좋은 한국인들을 만났다. 이상현 변호사가 왔다. 우리 가족의 행정소송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출입국에서 루렌도 가족이 처할 상황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 행정당국은 사유를 정확하게 밝히지도 않고 있다.” 2월 14일, 보베트가 긴급 상륙 허가를 받아 병원에 다녀왔다. 다음 날에는 법원에 재판을 신청했다. 나는 법원에 나가 말했다. “우리가 (난민)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소송이 가능한지) 내게 설명해주지 않아서 오히려 내가 질문했다. (출입국에서) 준 종이에 우리는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출입국은 말했다. “진정한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가짜 난민을 여과하는 것이다.” 인천공항 출입국외국인청은 우리 가족의 심사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4월 25일, 인천지방법원은 법무부의 결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원고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절차상 위법을 인정하기 어렵다.” 우리의 상황이 안타까운가. 나는 많은 것을 바란 것이 아니다. 무턱대고 난민으로 인정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한두 시간 심사로 우리를 ‘명백히 난민이 아니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물었을 뿐이다. 제대로 절차에 따른 난민 심사를 받고 싶었다. 식빵과 우유는 우리의 주식이었다. 잠들 수 없는 날이 길어졌다. 배가 아파 먹을 수 없는 것이 많아졌다. 돈은 금세 떨어졌다. 나는 상고를 신청했다.

 7월 19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었다. ‘난민과함께공동행동’과 이상현 변호사는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우리 가족이 난민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그 옆에는 또 다른 피켓을 든 이들도 있었다. 피켓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앙골라에서 온 콩고인은 난민혜택 받을 생각 말고 콩고로 돌아가라!

 

 8월 8일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아동권리 침해’로 진정을 냈다. 사단법인 두루, 국제아동인권센터가 우리의 대리인을 맡아주었다. 아이들이 수업을 받기를.

이 나라에 들어온 지 곧, 1년이다

 

 9월 27일, 서울고법에서 우리 손을 들어줬다. “난민 심사를 받을 기회를 줘야 한다”는 판결. 난민 신청인은 90일 동안 입국을 허가받는다.

 10월 11일이었다. 우리는 공항을 나섰다. 287일 만에.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나올 수 있게 되어서 너무 행복하다.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아이들은 “고기를 먹고 싶다”고 외쳤다. 그래서 삼겹살을 먹었다. 우리는 경기도 안산의 ‘안산 이주민결핵환자쉼터’로 갔다. 홍주민 목사님이 함께 했다.

 

 우리 가족은 아프다. 15일, 병원에 다녀왔다. 나는 혈압이 심각한 수준으로 높다고 한다. 보베트는 이빨이 많이 안 좋고, 우울증이 갈수록 심해진다.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 아홉 달 동안, 늘 켜져 있던 불빛과 캐리어 굴러가는 소리, 사람들의 눈빛이 아이들을 괴롭혔을 것이다.

 

 공항에서 나왔다고 끝이 아니다. 대법원 판결이 나야 난민 심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와 보베트는 돈을 벌면 안 된다. 주변에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살고 싶다. 가족들과 함께. 그것이 전부다. 이 나라에 들어온 지 곧, 1년이다.

 

 

 

처음 이 사안에 관심을 갖게 한 시사IN 기사. 정말 좋은 기사였다.

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134

 

70일 넘게 인천공항에 사는 아이들을 위하여 - 시사IN

“깜, 깜!” 공항 라운지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는 아이들을 말리느라 엄마의 언성은 자주 높아졌다. ‘깜’은 프랑스어로 조용히 하라는 의미다. 아이들이 먹다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보고 공

www.sisain.co.kr

 

루렌도 가족의 가장 최근 기사. 여전히 다툼은 이어지고 있다.

news.tf.co.kr/read/life/1816160.htm

 

[TF현장] '난민이 되고 싶어요' 루렌도 가족의 첫 한가위

앙골라 출신 난민 신청자 루렌도 은쿠카(왼쪽)와 가족들은 최근 난민 심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송주원 기자한국어 능숙해진 4남매…공항 생활 후유증 여전[더팩트ㅣ..

news.tf.co.kr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