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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자 하는 시도 : 김세희 『항구의 사랑』으로부터

Algori 2021. 1. 22. 23:03

옛 블로그 끌어오기 1탄  책 리뷰 이야기(3)

 

2019년말 작성

 

 

사랑하고자 하는 시도

 

항구의 사랑 / 김세희 / 2019년 6월 / 민음사

 

 시절, 그들의 사랑

  사랑은 사람을 한없이 연약하게도, 한없이 강인하게도 만듭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마법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엇보다도 더 강력하게 현실을 인식시키기도 합니다. 김세희 작가의 첫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은 사랑하고자 하는 첫 시도를 말합니다.

  항구 도시 목포에서, 팬픽 이반이라 칭해지기도 한 세대의 소녀는 다른 소녀를 사랑합니다. 빠른년생으로 몸집도 작고 발육도 느린 준희는 나름 학교에 적응하고자 하지만 사람과 삶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 어려움을 느낍니다. 초등학교 때 준희의 친구가 되어준 인희는 달라진 모습으로 이반 무리의 유명인사가 되어 나타납니다. 소위 ‘그런 애들’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준희는 연극부에서 만난 민선 선배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준희의 사랑은 좌절하고, 대학생이 된 그녀는 그 시절을 숨겨야만 합니다. ‘남자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으로 고등학생의 자신을 잊으려던 그녀는 사라진 줄로만 여겼던 기억을 다시 마주합니다. 그 시절, 목포의 소녀들에게는 아이돌이 있었고, 팬픽과 칼머리가 있었습니다. 여중과 여고에서 그들은 서로의 친구, 연인이 됩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준희는 누구에게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요.

 

나를 사랑하고자 하는 첫 시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는 모든 이를 매력적으로 느끼고 괴로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멋지고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둔갑하지요. 그와 반면 자기 자신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변하고 맙니다. 여기에서 오는 괴리감이 우리를 고통과 슬픔으로 밀어 넣기도 하지만, 반면 그런 차이가 사람을 존중하고 다가가게 하는 동기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민선 선배의 전화, 부르는 말, 행동 하나에도 준희는 마음을 졸이고 설레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 역시 나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길을 잃은 사랑은 각자의 마음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틀어집니다. 자기혐오, 연민, 분노, 슬픔…. 준희는 그 시절을 지워버리기로 합니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준희는 민선 선배와 인희와 목포의 이야기를 자기 삶의 가운데로 끌어옵니다. 작가가 되고 나서 소설로 쓰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 첫 계기는 지인 H의 커밍아웃이지만, 사회와 함께 그녀 스스로 인식이 변한 일, 결국 소설로 발화하고자 하는 마음속 이야기의 본질에도 그 계기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잃고 친구를 버리면서도 사랑을 향해 나아가던 모습 역시 유쾌함 속에 우울과 불안을 숨겨둔 준희의 모습입니다. 소설을 쓴다는 일, 잊고자 했던 (그러나 결코 버릴 수 없는) 사랑의 기억을 다시 꺼내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사랑하고자 하는 첫 시도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우리의 이야기

  김세희 작가는 특유의 담담하지만 슬픔을 자아내고는 하는 정직한 문장들로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젊은 작가상을 받은 단편소설 「가만한 나날」에서 회사, 사회생활 속에서 자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던 주인공 경진과 준희는 겹쳐집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단순히 첫사랑뿐 아니라,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일, 여성의 섹슈얼리티 등 사회가 예민하게 주목하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면서도 배려심 있는 말들로 풀어냅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고 여겼던 자아가 입시 경쟁과 사회의 요구 속에서 축소하고 좌절하는 모습 역시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자기 자신과 사회가 던지는 덫을 이겨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사랑과 잊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준희의 기억과 시도 역시, 우리 모두의 슬픔과 기쁨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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