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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영웅들은 어디로 : 신형철『몰락의 에티카』제1부로부터

Algori 2021. 1. 22. 22:35

옛 블로그 끌어오기 1탄  책 리뷰 이야기(1)

 

2018년말 작성. 

 

 

 

흩어진 영웅들은 어디로

소설의 윤리에 관하여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제1부 <만유인력의 서사학>으로부터

 

 

1. 신이 떠난 세계를 알아차리다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 함께』는 최근 동명의 영화로 재구성해 커다란 성공을 거둠으로써 재차 주목받았다. 시기에 발맞추어 유료 서비스던 웹툰은 네이버 웹툰에서 무료로 재연재되었다. 1부 ‘저승편’에서는 이승의 죄를 심판하는 기준들이 등장한다. 망자들은 거짓, 불효, 살인, 외면 등 갖은 잘못들의 벌을 따져야 한다. 우리나라 신화에서 따온 판단 방식은 꽤 세밀하고 엄격하여, -요즘에야 선량하다는 말과 동일시되는-특별한 일 없이 지내온 ‘김자홍’이라는 인물도 기준을 통과하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와중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웹툰의 독자들이 다시 댓글을 작성할 기회를 얻었으며, 2010년 연재할 때의 베스트 댓글과 2018년 현재의 베스트 댓글에 차이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과거에 “두렵다. 나도 사는 방식을 다시 되돌아보아야지.” 류의 댓글이 “너무하다. 저렇게 기준이 깐깐하면 그 누가 통과할 수 있겠는가. 저 방식은 구시대의 도덕관념이다.” 류의 댓글로 변화했다. 신과 사후세계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신과 사후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베스트 댓글에 올랐다는 것은 만화를 읽은 다수의 대중 독자들이 이에 공감하였다는 방증이다. 과연 그 8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이토록 달라질 수 있었던가?

   나는 이것을 '사상의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식의 차이는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다만 대중이 이제 뚜렷이 그것을 인식하고 발언하고 공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뿐이다. 즉, 가치판단의 영역이 신-도덕의 영역에서 개인-윤리의 영역으로 변모한 것을 모두 깨달았다는 점이다.

   도덕과 윤리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신형철의 말을 빌려오기로 한다.


  도덕은 사회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에 가깝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이라고 칸트에 기대어 말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었다.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규준에 근거하는 강제적 규율이 도덕이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내제적 규준에 근거하는 임의적 규율이 윤리라고 스피노자에 기대어 말한 것은 들뢰즈였다. 어떤 식으로 말하든 우리에게 자유, 선택, 책임의 세계를 열어놓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윤리라는 층위다. 그리고 그것들 없이 주체는 성립될 수 없다. 윤리의 장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체일 수 있다. (신형철, 『윤리의 에티카』, 문학동네, 142쪽. 이하 인용은 쪽으로만 표시하도록 한다.)


  변화는 이미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대중이 알아차렸다는 것은 그와 궤를 달리한다. 변화와 인식은 가깝지만 멀다. 변화는 인식을 가져오고 인식은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온다. 니체의 선언 -‘신은 죽었다’. 맥락이 모두 같지는 않다 해도.- 뒤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탈피를 위해 노력해왔다. 신과 도덕의 굴레를 개인과 윤리의 영역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그러나 달콤해 보이는 이것은 당연히 고통스러운 작업일 수밖에 없다. 나와 타자를 포괄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판단과 책임의 영역을 개인이 나누어 짊어지는 것은 내 안에 신을 키우는 것과 다름없는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미루어 놓았다. 

  『신과 함께』의 댓글이 바뀐 기간, 대한민국의 지난 8년은 격동의 기간이었다. 촛불 혁명이 사람들에게 개인의 주체성과 능동이 가진 힘을 일깨워주었다. 동시에 일종의 두려움 역시 잉태했다. 신에게 미룰 수 없어 국가-자본-또 다른 개인에게 미루어 두었던 (박정희의 신성화, 그를 계승한 박근혜 정권 시기에 촛불 혁명이 발발했다는 것은 지켜보아야 할 대목이다) 자유와 선택과 책임이 결국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을 알게 된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 규명이 촛불 혁명의 중요한 축이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 비평’이 가능한 것처럼 ‘윤리학적 비평’이 가능하다면 그 방법론을, 그러니까 윤리-시학(ethics-poetics)을 구축해야 할 때가 됐다. … 이 결론은 서론이다. (178쪽)


  개인의 윤리가 지니는 중대성을 더는 평론가에게만 미루어 둘 것이 아니다. 현실과 인간을 반영하는 소설과 우리는 이 문제를 한편에 내버려 둘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2. 신이 살던 시대의 영웅들

 

  신형철은 문학 속의 윤리학을 제시하는 데 있어 한 인물을 집요하게 끌어들이고 있다. ‘오이디푸스’다.


  유사 이래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던 사람이 어디 오이디푸스뿐이었겠는가.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그의 무지는 가장 치명적이고 그의 몰락은 가작 극적이다. (118쪽)


  감히 오이디푸스를 인류사 이래 가장 문학적인 인물이라 칭할 수 있을까? 그는 왕, 근친상간의 행위자, 버려진 아이이자 영웅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정수로 불린다.

  「우리가 ‘소설의 윤리’를 말할 때 너무 많이 한 말과 거의 안 한 말 – 세 편의 평론에 대한 노트」에서 신형철은 다른 평론가들의 평론을 끌어와 소설의 윤리학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가 선택한 복도훈과 강유정의 텍스트 역시 오이디푸스를 바탕으로 현시대의 문학을 읽어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하는 글이다.

  오이디푸스의 몇 가지 특성을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근친상간의 행위자'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였다.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는 근친상간의 규율을 인류 문화의 시작으로 보았다. 근친상간 금지는 부족 교류의 시발점이다. 집단 간 결혼을 기점으로 동맹이 협력하며 교류가 일어나고 더욱 넓은 범위에 끼치는 영향력이 생겨난다. 따라서 근친상간이라는 범죄는 인간의 기본 도덕을 흔드는 가장 커다란 죄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존속살해와 근친상간을 한 몸에 껴안은 오이디푸스는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장 배척되어야 할 인물 중의 하나이다.

  다시, 오이디푸스는 '버려진 아이'다. 그는 신탁의 결과에 따라 아버지에게서 버림받는다. 이 버림받음은 오히려 신탁을 이루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신이 정해준 섭리에 따라서 버림받고 다시 인간의 왕 자리에 오르지만 결국 신-도덕에 의해 더 큰 버림을 받게 되는 존재이다. 오이디푸스가 버림받는 것은 도덕이 인간 전체의 삶에 있어 얼마나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이다. 그는 버려졌기 때문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으로 존재가 부정당한 인물이다.

  다시, 오이디푸스는 '눈먼 사람'이다. 그는 마침내 자기 운명을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벌을 내린다. 이때 취한 행동은 자기 눈을 찌르는 행위다. 이 눈멂은 아주 다양한 층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보통 이 눈멂은 오이디푸스의 무지를 상징하며 그가 비극의 주인공이 되게 만들어준 성격적 결함(성급함과 더불어)으로 읽혀진다. 하지만 이 눈이라는 장기와 시각이라는 감각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았을 때, 그 어떤 곳이든 간에 해석할 가능성은 열려있다. 강유정이 사용하고 신형철이 지적했듯이 ‘눈에 이성(더 크게는 근대성)이라는 내포를 부여해서 저 까마득한 고대 그리스 시대의 비극을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에 대한 알레고리(170쪽)’로 만들 수도 있다.  

  자, 여기서 또 다른 문학적 경험이 발생한다. 그리스 비극을 읽어 나가는 데 있어서 ‘카타르시스’를 강조하고는 한다. 카타르시스는 그 비극이 향한 방향이 내가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오이디푸스를 보고 안도하지만 않는다. 우리는 그를 동정한다. 공감한다-공감은 이 시대 수많은 콘텐츠들의 키워드다-. 동시에 두려워진다. 태생적으로 버려진 인간, 무지 때문에 수많은 잘못을 반복하고 만 인간. 우리 역시 인간이다. 우리는 오이디푸스를 마땅히 아주 먼 곳에서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 우리에겐 “인생을 통째로 복습”해도 알 수 없는,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앎’이 있으며, 거기에 나의 진실과 향유가 걸려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처음부터 자신의 욕망을 강탈당했기 때문에” 무죄라고 말한다. (78쪽)


  죄가 없음에도 신에 의해 그 벌을 받는 오이디푸스를 요즈음 그저 비극의 주인공으로만 읽어 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오이디푸스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다. 그는 인간의 왕이고, 인간 세계를 위협하는 스핑크스를 물리친 영웅이다. 신이 살던 시대의 영웅인 그는 신에게 벌을 받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오이디푸스가 될 수 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동시에 신-도덕이 정해놓은 사회를 벗어나 다시금 선택해야 하는 존재 말이다.

 

  신화에는 수많은 영웅이 등장한다. 물론 그들은 신보다 더 뛰어난 업적을 쌓거나 신의 지위에 도전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그들 나름의 법칙을 지켜나가며 자기 자신, 혹은 인간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대부분은 신이 내린 과업을 마주하고 그를 뛰어넘거나 실패하면서 좌절한다. 우리 신화의 오늘이, 할락궁이, 강림도령이 있고,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오디세우스, 테세우스 등이 있다. (반인반신인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등을 제외하더라도) 신형철은 이러한 영웅들을 몇 명 더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데려온다.

  「수음하는 오디세우스, 노래하는 세이렌 - 「무진기행」의 한 읽기」의 오디세우스, 「정치적으로 올바른 아담 – 이기호,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문학동네, 2006)」(『절망의 에티카』 제 5 부에 수록)의 아담이 그들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는 개념이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개념 없는’ 인간이다. 알다시피 ‘개념 없는 인간’이란 말은 이제 욕설이 되어버렸다. … ‘개념’이라는 것들의 상당 부분은 한낱 상대적인 가치들의 똥덩어리이거나 철 지난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화석이다. 그러니 ‘개념 없는’이라는 말이 욕설이어야 할 까닭이 없다. … 그 영도의 알몸 앞에서 거대한 ‘개념’들은 별수 없이 허망해지고 만다. 아담의 시선을 복원하는 것, 그 ‘개념 없음’의 자리에 서는 것은 그래서 급진적일 수 있다. (629-630쪽)


  오디세우스와 비교되는 소설 속 주인공 윤희중, 아담의 일면으로 설명되는 작가 이기호. 오디세우스와 아담은 각자 그 다른 형질을 지니고 있으나 신이 살던 시대의 영웅들이다.

  그들은 이 영웅들과 분명 닮은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그와 확연히 다른 모습들도 보여줄 수 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그들의 운명을 한 손에 쥐고 나락에 빠뜨리거나 해결할 수 있는 신이 없다. 오디세우스인 윤희중이 소설 속에서 만나는 것은 세이렌, 하인숙이다. 세이렌 역시 신이 아닌 하나의 개체다. 이 둘이 마주했을 때, 윤희중은 개인적인 윤리에 따라 선택을 내린다. 어머니와 아내로 대비되는 초자아가 신-도덕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이를 판단하는 것은 역시 인물이다. 오디세우스의 근 이십 년에 달하는 아주 길고 긴 여행담 가운데 세이렌 파트는 아주 짧지만, 우리는 윤희중의 모습에서 오디세우스를 찾을 수 있다. 아담으로 비견된 작가는 더욱 그렇다. 신형철은 그에게 영웅으로서의 많은 것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개념 없음’만을 부여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그에게서 충분히 아담의 일면을 마주한다.

 

 

3. 새로운 영웅들의 윤리

 

 

  「오이디푸스 누아르 – 영화 <올드보이>를 위한 10개의 주석」에서 신형철은 <올드보이>의 오대수와 오이디푸스를 동일 선상에 놓고 읽어 나간다. 오대수는 오이디푸스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더 인간적인 인물이다. 그는 미도와의 근친상간을 범하게 되고, 이는 역시 그의 무지에서 온다. 그러나 대수는 오이디푸스와 마찬가지로 ‘몰랐다’의 의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말했다’는 행동, 그 행동이 일정한 욕망에 기대어 있는 인물이므로 조금 더 다른 면에서 읽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신형철은 지적한다. 더 흥미로운 지점은 두 인물의 마지막에 있다.


  눈먼 오이디푸스는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딸 안티고네의 부축을 받으며 테베를 떠나 떠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국적인) 눈 덮인 설원을 미도에 의지해 서 있는 오대수처럼 말이다. … 오이디푸스는 숭고한 죽음 속으로 기적처럼 걸어들어감으로써 모든 이들의 난감함을 덜어준다. 이 난감함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입을 다문 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오대수를 볼 때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고통스러운 난감함과 다르지 않다. 저 괴물 오대수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 그러나 오이디푸스와는 달리 오대수에겐 그 어떤 숭고한 결말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83쪽)


  오이디푸스는 신-도덕이 절대적인 시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오대수는 신과 상관없는, 인간이 내린 복수에 의해 파괴되었기에 신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 마지막에 미도와 오대수의 선택으로 인해 둘은 다시 ‘반복’을 선택한다. 이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윤리에 의한 선택이라고 신형철은 말한다. 다시 보자. 이제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신-도덕조차도 개인의 윤리로 뒤집을 수 있다. 인간은 이제 { }을 배반할 수밖에 없다. 빈칸을 채운다. 신의 이름을 집어넣으면 작은 변화지만, 도덕의 이름을 집어넣으면 아주 커다란 변화다.

  윤희중이라는 인물의 평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궤를 달리한다. 


  오디세우스는 윤희중과 닮았다. 더 일반화한다면, 이는 남성 주체의 전형적 특질이다. 그는 그녀의 향유를 회피한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아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듯이, 윤희중 역시 하인숙의 노래를 (너무 깊이) 듣지 않아야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 혹은 자기 방식대로 들어야 한다. … 윤희중의 포기와 상경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은 상경의 순간을 그가 하인숙(무진)을 배반하기를 선택함으로써 그 자신의 내적 균열을 극복하고 통합된 남성 주체로 재탄생하는 순간으로 읽는 것이다. 이 결론을 받아들이되 그 이유를 달리 설명해보자. (112-113쪽)


신형철이 해석 과정에서 하인숙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던 바- 여전히 어떠한 범주를 깨지는 못했지만-와 같이, 여성 인물들에 대한 인식 역시 다각도로 변화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여신은 존재하나 여성 영웅은 없다. 그 여신의 역할조차도 남신에 비해 부족하다. 오디세우스는 영웅이며 남성이고 그를 유혹하고 꾀어내는 존재인 세이렌은 괴물이며 여성이다. 이는 구시대적 생각이며 변해야 할 가치이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그 정절로 인해 찬양받아왔으나 그 정절은 이제 찬양받을 범절이라고 볼 수 없다. 신-도덕이 억지로 지켜온 남성 우위의 굴레는 점점 파괴되어 간다. 이는 개인-윤리의 탄생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단순히 이 남성-여성의 성적 가치관의 변화만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발전이 이룩한 생활 양식의 다양성은 날이 갈수록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인류의 탄생부터 국가의 탄생까지의 시간,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변화의 속도는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은 이러한 현실에 따라 새로이 재고되어야 하며 결국 신-도덕과 같이 한정된 하나의 덩어리는 이전 같은 맹위를 떨칠 수 없다. 또한, 개인이 사고하고 경험할 수 있는 폭이 무한대로 넓어짐에 따라 우리는 모든 분야에 있어 판단을 내려야 할 필요가 생겼다. 여기에도 일정한 하나의 법칙을 부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형철이 이 평론집의 프롤로그에서부터 끊임없이 언급하였듯, ‘근대문학의 종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 소설을 일종의 도덕과 진리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인류의 보편성을 소설 안에서 찾으려는 노력 역시 낡은 노력일지 모른다. 인간을 하나의 보편적 가치로 묶어야 한다는 기본 관념 자체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사람을 굳이 하나의 선으로 묶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결국,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라는 개념을 더 억압하고 제한하는 것은 아닌가?

  이제 시대는 개인에게 가치판단을 맡기고 있다.

 

 

4. 영웅?

 

  윤리의 영역에서 모든 질문은 첫 번째 질문이고, 모든 첫 번째 질문은 이미 하나의 창조다. 발화의 종말과 행위의 파국에서 시와 소설은 시작된다. 그대 자신의 말을, 그대 자신의 행위를 하라. 이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 nibilo) 라 부를 것이다. 문학은 몰락 이후의 첫 번째 표정이다. 몰락의 에티카(Ethica)이다. (19쪽)

 

  일반적으로 윤리학이 추구한다고 간주되는 것은 ‘이상(ideal)’ 혹은 ‘선(good)’이다. 그러나 그런 윤리학들은 속임수가 아닐까 하고 라캉은 묻는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선한 것들은 과연 ‘누구에게’ 선한 것인가 말이다. (165쪽)


  이제 개인이 가치를 판단하는 시대가 다가왔고, 그렇기에 소설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읽고 쓰여야 할 것은 자명한 사실처럼 보인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끈 영화 ‘어벤져스’에는 악당 타노스가 등장한다. 타노스는 넘쳐나는 절망과 불행의 이유를 개체수에서 찾는다.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의 절반을 제거하고자 마음먹는다. 그래서 타노스는 악당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다수의 관객은 그 타노스의 심정에도 공감을 표한다. (추가. 최근에 '조커'를 보라. 이러한 경향은 한층 심화했다.) 또 다른 할리우드의 영화들 ‘킹스맨’, ‘데드풀’ 등은 죽음을 경쾌하고 발랄하게 표현한다. 죽는 사람들이 악당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땅히 옳은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방식의 차이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사람들에게 지지받았다. (추가. 요즘 네이버-다음 웹툰의 상위권을 차지한 작품들은 대다수 '사이다'에 기반한다. 악당은 벌을 받아라. 기본 기조다.) 

  우리나라의 가장 최근 소설을 본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2018 젊은 작가상’으로 선정된 소설 몇 가지를 살펴보자. 박민정의 ‘세실, 주희’에서는 여성의 문제로 고민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국가성으로 갈등한다. 판단이 필요한 갈등은 하나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개인의 다양한 지점에서 발동한다. 정영수의 ‘더 인간적인 말’에서 인물은 자체적으로 안락사를 선택하고 실행한다. 자살은 인간이 피해야 할 가장 큰 가치가 아니었던가?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서 인물들은 게이의 정체성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예술가이기도 하고 그 날 밤의 일화에서는 도둑이기도 하다. 마이크를 훔치는 행동은 주인이 별로이기 때문에, 게이라서 갈등했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인 판단을 제외하고 보았을 때, 이 모든 것은 개인이 선택한 정체성과 판단을 지키기 위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 소설들은 선-도덕의 관념에서 가치를 판단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글일 수 있다. 옳고 그르다는 판단할 수 없다-이 역시 개인-윤리의 한 면모다-. 그저 그렇다는 거다. (추가. 주노 디아스의 소설 역시 이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2020 젊은 작가상'은 여성 담론들이 핵심을 차지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덧대어져 있다.)

 

  이제 보아야 할 것은 더 어렵고 큰 문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제 흩어진 영웅들은 어디로 갔을까. 영웅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우리는 그들처럼 많은 것을 한 몸에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이를 부여할 강력한 신의 권능이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특질들을 쪼개서 부여받은 수많은 영웅이 등장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를 억제할 신의 권능이 없기 때문이다. 신이 살던 시대의 영웅들은 신이 사라짐과 동시에 같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보통의 인간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흩어졌다.

  그렇다면 영웅은 타고 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부여받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부여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이야기인 것 역시 알고 있다. 신-도덕이 강력하게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가 아닌 것은 맞다. 그렇다고 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신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는 인물이며 이 사회는 어떠한 동일한 믿음에 의해 지탱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자본, 정보, 무력, 도덕…. 따라서 이것들 역시 영웅을 탄생시킬 수 있다. ‘어벤저스’의 영웅들처럼. 영웅이 모두 옳지도 않다. 대부분 우리가 아는 영웅은 힘이 셀 뿐인 경우가 많다.

  선과 이상을 향하는 윤리라는 말은 옳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저 가치를 판단하는 개인의 잣대가 있다. 결코 도덕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나 역시 도덕의 신봉자이다. 허나 이제 이 도덕이라는 말은 유연한 고무와 같아져서 하나의 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독립투사들을 비판해야 할까.

  소설은 이처럼 사회를 지탱하는 여러 모습의 신이 만들어낸 영웅이 아닌 영웅들을 다룬다. 개인이 만들어낸 영웅적인 면모들. 개인의 윤리적 선택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 옳은지, 그른지, 어떤 기준도 없이 그저 자기 자신을 밀고 나가는 인물들. 이 사회를 지탱하는 신에게 고개를 내미는 것은 역시 인간인 영웅의 일면이다. 세상은 끊임없는 판단과 선택을 요구한다. 개인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세계이고 우리는 이 판단을 위해 타자에게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 판단이 무서워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다. 책임지지 않고 방 안으로 파고들며 세상과 격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소설, 소설가와 소설 속 인물들이 맹렬하게 세계를 살아내는 모습은 여러 시행착오와 고통 속에서도 앞서 나가는 한 발자국이 될지 모른다. 이제 소설은 더욱더 적당히 만들어낸 이야기의 단계에서 멈추면 안 된다. 열렬히 살아낸 삶의 이정표로 책을 읽어 나갈 수많은 개인-영웅들의 조언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은 인간과 삶에서 멀어지지 않으므로 역할을 해내야 한다.

 

  이건 낙관론자의 기대일 뿐인가? 많은 고난을 뚫어내고 살아가려면 영웅은 낙관론자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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